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(문단 편집) == 개요 == [[이탈리아]] [[제노바 공화국]] 출신으로 [[스페인]]에서 활동한 탐험가, 항해사, [[콩키스타도르]]. 흔히 [[아메리카]] 대륙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지만, 아메리카는 무주지가 아니었고 [[원주민]] 문명이 존재했으므로 '''"[[아메리카]]를 발견했다."'''는 [[유럽인]] 입장에서의 시각일 뿐이다.[* 마찬가지로, 유럽 중심으로 만들어진 말인 [[대항해시대]]라는 말도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다. 대신에 신항로 개척으로 바뀌었다. 요즘은 미국 교과서도 '''발견하다(discover)''' 보다 '''만나다(encounter)'''로 서술하기를 권한다.] 또 유럽인 중에서조차 [[북유럽]]의 [[바이킹]][* 《[[빈란드]] 사가》의 주인공 [[레이프 에이릭손]] 일행. [[빈란드 사가|전설]]로만 전해 내려오다가 현재의 [[뉴펀들랜드 래브라도주|뉴펀들랜드래브라도]] 일대에서 [[바이킹]]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사실로 입증되었다.]이 먼저 아메리카에 도달한데다, 아메리카로 인식한 것은 [[아메리고 베스푸치]]였기 때문에 실제로는 '''[[아메리카 대륙]]과 [[유럽]] 대륙의 지속적 교류 계기를 만든 [[유럽인]]'''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. 콜럼버스는 근대 이후 오랜 시간 유럽인들에게 위인이자 영웅적인 모험가로서 추앙받았으며 특히 [[아메리카]] 대륙에 터잡은 신생 독립국가 [[미국]]은 자신들의 건국 서사시를 마련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문화·예술계의 각 분야에서 콜럼버스의 항해 관련 신화를 발굴하고 재창조하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. 정치적으로도 수도를 '''[[워싱턴 D.C.|컬럼비아 구]]'''로 명명한다든지, '''콜럼버스의 날(Columbus Day)'''이 [[국경일]]로 정해져 있는 등 아직까지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. 이러한 경향은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[[독립국]]에게도 전파되었다.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Desembarco_de_Colón_de_Dióscoro_Puebla.jpg|width=100%]]}}}|| || {{{-2 '''''디오스코로 테오필로 데 라 푸에블라 톨린, 1862, 캔버스에 유화"'''}}}[br]아메리카에 상륙하는 콜럼버스 일행을 그린 기록화.[br]주위에 그를 경외하는 [[타이노인]]이 발가벗은 채로 묘사되어 있다. || || [[https://i.namu.wiki/i/iLXBmkphcVDvayzJtlS4nBMp-6euS1QVUKrTgGibgYUglK3ToUGicrchez_6k-T7UNmjZHF4nCjzu8NcuRV3jSgtMDQeBHxwHFJM_CLzPEJQ6utPmDLz-I92LuxXVvQCl3QIkZ64B_OI1YsuoNerWw.webp|width=100%]] || || '''"아메리카의 발견'''"[br](The Discovery of America)[br]미국에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각상으로, 왼쪽에 그를 경외하는 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이 반 나체로 묘사되어 있다. 이 조각상은 1958년 철거됐다.[* [[미국 국회의사당]] 입구 왼쪽에 있었다. 오른쪽은 "구출(The Rescue)"이라는 조각상이 있었는데, 개척자를 위협하는 원주민을 붙잡아 구출하는 백인 남자가 묘사되어 있다. 이 역시 동일한 년도에 철거돼, 지금은 개척자의 개 조각상만 남아있다.] || '''그러나 콜럼버스는 [[아메리카 원주민]]의 입장에서는 [[침략자]], [[학살자]]였고, 그 인성과 능력 또한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단히 저열한 수준이었다.''' 때문에 현대에 와서 [[68운동]] 등의 대두로 [[사회 정의]] 운동의 붐을 타고 원주민 중심의 아메리카사 인식이 보급된 뒤로는 그에 대한 평가가 나빠진 부분도 있다. 미국 내 [[오리건]], [[보스턴]], [[필라델피아]] 등 몇몇의 주에서는 콜롬버스의 날 명칭 대신에 원주민의 날로 기념하기로 결정했다. 시카고는 2020년 콜럼버스 조각상 2개를 철거했고, [[코네티컷]]에서는 콜럼버스 석상의 머리 부분이 잘려 사라지기도 했다. 이로 인해 콜럼버스는 [[역사는 승자의 기록|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된다는 것]], 또 특정 위인의 업적과 인품이 항상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할 때 대표적인 예시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기도 하다. 다소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이긴 하지만, 역사를 바라볼 때 조금이라도 주관이 개입되는 순간 얼마나 진실이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